10월 2일 중세의 운명을 바꾼 날: 살라딘의 예루살렘 탈환과 제 3차 십자군 전쟁의 서막
성전(聖戰)의 도시, 운명의 기로에 서다: 1187년 예루살렘 함락
1187년 10월 2일은 중세사(中世史)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점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에게 지상 최고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위대한 술탄 살라딘(Saladin)이 이끄는 아이유브 왕조군에게 함락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십자군 국가들의 몰락을 예고했으며, 유럽 대륙을 뒤흔들어 리처드 1세와 같은 영웅들을 불러낸 제3차 십자군 전쟁의 직접적인 발화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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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
88년의 지배, 그리고 몰락의 전조
예루살렘은 1099년 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 기독교도들의 손에 잔혹하게 점령된 이후, 약 88년간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로서 이슬람 세력 한가운데 존재하는 ‘기독교의 섬’이었습니다. 하지만 12세기 후반, 이슬람 세계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여 강력한 통일 국가를 구축한 지도자가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쿠르드족 출신의 명장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즉 살라딘이었습니다.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서 지하드(성전)의 목표를 오직 하나, 예루살렘 탈환에 두었습니다. 그는 종교적 열정과 뛰어난 군사적 통솔력으로 무슬림 세력을 규합했고, 이는 십자군 국가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하틴 전투: 십자군 주력의 괴멸 (1187년 7월 4일)
예루살렘 함락에 앞서, 중대한 군사적 전초전이 있었습니다. 1187년 7월 4일, 갈릴리 호수 근처의 하틴(Hattin)에서 십자군 연합군과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군이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하틴 전투는 십자군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로 기록됩니다.
십자군 기사들은 무더위와 식수 부족으로 지쳐 있었으며, 살라딘은 이 점을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전투 결과, 예루살렘 왕국의 주력 군대와 핵심 기사단이 거의 전멸했으며, 국왕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을 포함한 수많은 귀족과 기사들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특히, 살라딘은 1차 십자군 당시 무슬림 포로 학살에 앞장섰던 악명 높은 기사 르노 드 샤티용(Raynald of Châtillon)을 직접 처형함으로써 복수와 정의를 상징적으로 실현했습니다.
하틴 전투의 승리로 살라딘은 십자군 국가들의 방어선 대부분을 무력화시켰고, 예루살렘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놓였습니다. 이슬람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빠르게 팔레스타인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며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습니다.
12일간의 포위와 10월 2일의 항복
살라딘은 1187년 9월 20일 예루살렘 성벽 앞에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방어를 이끌던 인물은 이벨린의 발리앙(Balian of Ibelin)이었습니다. 발리앙은 하틴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지도자 중 하나로, 성 안에 남아있는 시민들과 소수의 병력을 규합하여 결사항전을 준비했습니다.
당시 성 안에는 시민과 순례자, 그리고 도망쳐 온 난민까지 수만 명의 기독교도가 갇혀 있었습니다. 발리앙은 살라딘에게 도시를 파괴하기 전에 명예로운 항복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처음에는 살라딘이 무조건적인 점령을 주장했지만, 발리앙은 만약 항복을 거부한다면 성 안의 모든 기독교도들이 가족을 죽이고 성지를 파괴한 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이 협박은 살라딘의 관용적 본성을 자극했습니다. 살라딘은 성지에서 유혈 사태를 원하지 않았고, 기독교 세계와의 불필요한 적대 행위를 피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1187년 10월 2일, 살라딘은 기독교도들이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도시를 떠나는 조건으로 예루살렘의 항복을 받아들였습니다.
관용의 술탄, 살라딘: 1차 십자군과의 극명한 대비
예루살렘 함락이 역사적으로 가장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살라딘이 보여준 관용(Magnanimity) 때문입니다. 이슬람의 승리는 88년 전 1차 십자군의 점령과는 극명하게 대비되었습니다.
1099년의 피의 학살
1099년,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도시 안의 무슬림과 유대인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피가 무릎 높이까지 찼을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슬람 세계에 깊은 상처와 분노를 남겼습니다.
1187년의 관용과 배려
살라딘은 88년 전의 복수를 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복 대신 자비를 선택했습니다.
몸값 조건부 석방: 그는 성 안에 있던 기독교도들에게 정해진 몸값을 지불하면 자유롭게 떠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당시 10디나르(기사), 5디나르(평민 남성), 2디나르(평민 여성)로 책정되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살라딘 자신의 재산과 그의 동생 알-아딜이 기부한 돈으로 몸값을 대신 지불하도록 했습니다.
노예 석방: 몸값을 낼 수 없는 수천 명의 가난한 기독교도들을 살라딘은 그냥 풀어주었으며, 심지어 성직자와 병든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안전 통행권을 제공했습니다.
종교적 존중: 그는 이슬람 성지인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을 정화하고 십자가를 제거했지만,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를 포함한 기독교 성지들은 파괴하지 않고 순례자들의 방문을 허용했습니다. 이는 종교적 상호 존중의 모범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살라딘의 태도는 당대 유럽의 연대기 작가들에게까지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를 기사도 정신의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의 관용은 단순한 자비심을 넘어, 이슬람 지도자로서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이슬람 세계의 단합을 공고히 하는 정치적 효과도 있었습니다.
제3차 십자군 전쟁의 발발: 유럽의 충격과 대응
살라딘의 관용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함락 소식은 유럽 전역에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습니다. 성지 예루살렘을 빼앗겼다는 사실 자체가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군의 결성
로마 교황 우르바노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사망했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였으며,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새로운 십자군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열망에 더해, 당대 유럽의 가장 강력한 군주들이 성지 회복에 나섰습니다. 바로 제3차 십자군 전쟁(1189년~1192년)입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 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군주로, 가장 먼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190년 소아시아에서 강을 건너다 익사하는 비극적인 사고를 당하며 십자군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오귀스트): 그는 국왕 리처드 1세와 함께 출정했습니다.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사자심왕): 그는 용맹함과 기사도 정신으로 유명했으며, 제3차 십자군 전쟁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함께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해 성지로 향했습니다.
리처드와 살라딘의 대결
제3차 십자군 전쟁은 결국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이라는 두 걸출한 지도자의 대결 구도로 압축되었습니다. 리처드는 뛰어난 지휘력으로 아크레(Acre) 등 주요 해안 도시들을 탈환하며 십자군에게 일시적인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1191년 아르수프 전투(Battle of Arsuf)에서 살라딘의 군대를 격파한 것은 리처드의 군사적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군은 결국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했습니다. 오랜 원정으로 인한 피로, 보급 문제, 그리고 유럽 본국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문제(필리프 2세의 귀국 등)로 인해 리처드는 예루살렘 공격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말라 조약 (1192년)
결국, 1192년 리처드와 살라딘은 라말라 조약(Treaty of Ramla)을 체결하며 전쟁을 종결했습니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통치하에 유지된다.
비무장 상태의 기독교 순례자들은 성묘 교회 등 기독교 성지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
십자군은 티레(Tyre)에서 야파(Jaffa)까지의 해안가 영토를 유지한다.
10월 2일 예루살렘 함락으로 시작된 제3차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십자군 국가들의 생존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고 기독교도들의 성지 순례권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0월 2일의 유산: 동서양 역사의 전환점
1187년 10월 2일의 예루살렘 함락은 단순한 군사적 승패를 넘어, 중세 동서양 역사에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슬람 세계의 부흥과 자존심 회복
살라딘의 승리는 오랫동안 십자군에게 시달려온 이슬람 세계에 커다란 희망과 자존심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무슬림 단결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슬람의 지하드 정신을 다시금 고취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아이유브 왕조는 이로써 중동의 패권국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
유럽의 정치적 통합과 문화적 교류
예루살렘 탈환 실패는 유럽 국가들에게 또 다른 십자군을 조직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제4차 십자군은 오히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비극으로 변질되었지만). 한편, 제3차 십자군을 통해 유럽의 왕들이 협력하고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면서, 유럽의 정치 지형은 왕권 중심으로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이슬람의 선진 과학, 의학, 건축 기술 등이 유럽으로 전파되는 문화적 교류의 통로 역할도 했습니다.
10월 2일은 이처럼 한 도시의 함락을 통해 수많은 왕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두 거대 문명의 충돌과 화해, 그리고 끊임없는 성전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간 날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살라딘의 관용이라는 빛과 전쟁의 참혹함이라는 그림자가 교차하는 이 날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종교 간의 평화와 공존이라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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