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로 낙인찍혀 죽은 병사의 이야기
"나는 단지 너무 지쳤을 뿐입니다."
총살형 집행을 앞둔 한 병사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1916년 10월 18일, 제1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에서 영국군 병사 해리 패러(Harry Farr)는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당했습니다. 그의 죄목은 '겁쟁이(cowardice)'. 하지만 그는 정말 겁쟁이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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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Freepik |
전쟁터의 지옥, 그리고 보이지 않는 상처
해리 패러는 평범한 영국 노동자 계층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해 자원입대했고, 솜 전투를 비롯한 여러 격렬한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 경험 중 하나였습니다. 포탄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진흙탕 참호에서, 병사들은 쥐와 시체와 함께 생활했습니다. 독가스 공격의 공포, 동료들이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는 광경,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극한의 불안감.
패러는 이런 지옥 같은 환경에서 점차 무너져갔습니다. 그는 포격으로 인한 극심한 떨림과 공황 증세를 보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부르는 증상이었죠. 하지만 1916년 당시, 이런 심리적 트라우마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쉘 쇼크'라는 이름의 오해
당시 군의관들은 이를 '쉘 쇼크(Shell Shock)' 또는 단순한 '신경쇠약'으로 불렀습니다. 일부는 이를 진짜 질병으로 인정했지만, 많은 지휘관들은 이를 나약함이나 비겁함의 표현으로 여겼습니다. 특히 장교 계급 출신들은 "진짜 남자라면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성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패러는 여러 차례 병원 치료를 받았고, 의료진은 그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병력이 부족했던 군대는 그를 계속해서 전선으로 복귀시켰습니다. 그리고 1916년 9월, 그는 더 이상 참호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몸이 명령을 거부한 것입니다.
무자비한 군법의 심판
그의 지휘관은 이를 명백한 '명령 불복종'이자 '겁쟁이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군법회의가 열렸고, 재판은 불과 20분 만에 끝났습니다. 그의 변호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가 겪은 심리적 트라우마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판결은 사형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군만 약 306명의 병사가 겁쟁이, 탈영, 명령 불복종 등의 이유로 총살당했습니다. 이는 다른 병사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전쟁에서 두려움을 보이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메시지였죠.
90년 만의 명예 회복
해리 패러의 딸 제럴딘은 평생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가 단지 너무나 끔찍한 전쟁의 희생자였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2006년, 영국 국방부는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 중 총살당한 306명의 병사들에게 공식적으로 사면을 선포했습니다. 해리 패러를 포함한 이들은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참상을 견디다 무너진,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용감한 병사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해리 패러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비극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용기'와 '나약함'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용기의 반대말은 비겁이 아니라, 이해의 부족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전쟁 참전 군인들이 PTSD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사회로부터 "나약하다"는 오해를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압니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때로는 보이는 상처보다 더 깊고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해리 패러는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너무 지쳤을 뿐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은, 전쟁의 진정한 비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용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They shall grow not old, as we that are left grow old."
"그들은 늙지 않으리, 남겨진 우리가 늙어가듯."
- 로렌스 비니언, 전쟁 추모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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